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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주가가 하루 만에 10~15% 곤두박질치는 걸 계좌로 직접 목격한 분이라면, 이미 "이번엔 진짜 끝인가" 하는 생각이 스친 적 있을 겁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대형주가 폭락하던 날 새벽, 손절 버튼에 손가락을 올려놓고 멈칫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이 글은 그 공포가 합리적인 판단인지, 아니면 시장 구조를 오해한 데서 비롯된 것인지를 거시적 흐름과 제 경험을 바탕으로 풀어봅니다.

 

디리지즘: 미국 정부가 반도체를 포기할 수 없는 진짜 이유

반도체가 끝났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저는 한 가지 질문으로 되돌아갑니다. "미국 정부가 이 산업을 죽이고 싶을까?" 제 결론은 아닙니다.

 

코로나 시절 샌프란시스코에 잠깐 지냈던 경험이 있는데, 그때 마스크 하나 구하지 못해 사람들이 양말을 얼굴에 두르고 다니던 장면을 직접 봤습니다. 화장지도 없어서 마트 진열대 앞에서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그때 느꼈습니다. 세계 최강 미국이 기본적인 생필품조차 자국에서 만들지 못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충격적인지를요.

 

그 경험이 이후 미국의 산업 정책을 이해하는 데 실마리가 됐습니다. 미국 정부는 코로나를 기점으로 자국 내 전략 산업 육성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이른바 디리지즘(Dirigisme)의 부활입니다. 디리지즘이란 기업의 영업 자유는 허용하되, 어떤 산업을 키울지는 국가가 결정하고 자원을 집중 배분하는 프랑스식 국가 주도 계획경제 모델을 뜻합니다. 1940~70년대 서방 국가들이 전후 부채를 GDP 성장으로 해소할 때 썼던 바로 그 방식입니다.

 

바이든 정부의 칩스법(CHIPS Act), 인프라법,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은 모두 이 흐름의 산물입니다. 트럼프 행정부 역시 형태는 다르지만 방향은 같습니다. AI와 반도체를 미국의 GDP 성장 엔진으로 삼겠다는 의지는 정권을 가리지 않고 유지되고 있습니다. 정부가 이 산업을 죽이겠다는 신호를 보내기 전까지, 반도체 사이클이 완전히 꺼졌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게 제 판단입니다.

CAPEX 지출이 멈추지 않는 한, 사이클은 살아있다

제가 반도체 주가가 폭락하던 날 손절 버튼에서 손을 뗄 수 있었던 결정적 근거가 하나 있습니다. 하이퍼스케일러 기업들의 CAPEX 지출이 줄어들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CAPEX(Capital Expenditure)란 기업이 데이터센터, 서버, 반도체 장비 등 장기 자산에 투자하는 자본 지출을 의미합니다. 구글(알파벳)은 최근 분기 실적 발표에서 시장 컨센서스를 웃도는 CAPEX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메타 역시 2027년까지 지출 확대 계획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 구조를 이해하면 반도체 주가 등락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하이퍼스케일러 기업들은 오픈AI, 앤스로픽 같은 AI 기업들로부터 수주(RPO, Remaining Performance Obligation)를 이미 받아놓은 상태에서 지출합니다. RPO란 아직 인식되지 않은 미래 매출의 계약 잔고를 의미합니다. 즉, 이 지출은 기분에 따라 들였다 뺐다 하는 돈이 아닙니다. 계약에 묶인 돈입니다.

 

하이퍼스케일러들이 받은 돈은 삼성전자, SK 하이닉스, 마이크론 같은 반도체 기업으로 흘러가고, 이들은 다시 장비 업체에 투자합니다. 돈이 한 바퀴를 돌면서 각 단계에 흑자를 만들어주는 구조입니다. 미국 정부가 재정 적자를 내는 동안 민간이 흑자를 쌓듯이, 하이퍼스케일러의 지출이 커질수록 반도체 기업의 수익도 커집니다. 이 선순환이 멈추는 시점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단기 주가 급락을 사이클 종료로 해석하는 건 섣부릅니다.

하이퍼스케일러 CAPEX 모니터링 시 핵심 확인 항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 분기별 CAPEX 실제 집행 금액이 전 분기 대비 증감하였는가
  • RPO(미인식 잔여 계약 매출) 규모가 유지 또는 확대되고 있는가
  • 사채(회사채) 발행 금리 상승 여부 — 자금 조달 비용이 지속 가능한 수준인지 판단

HBM 쇼티지: 수요가 공급을 영구적으로 앞서는 구조

솔직히 이건 저도 처음에 과장된 얘기라고 생각했습니다. 반도체 쇼티지가 몇 년씩 지속된다는 게 직관적으로 와닿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공급망 구조를 뜯어보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HBM(High Bandwidth Memory)이란 일반 D램을 수직으로 여러 층 쌓아 초고속·대용량 데이터 처리를 가능케 한 차세대 메모리 반도체입니다. AI 가속기인 엔비디아 GPU에 필수적으로 탑재되며, 현재 SK 하이닉스가 시장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HBM 생산량을 당장 두 배로 늘릴 수 없다는 점입니다. 공장을 짓고 장비를 들여오고 공정을 안정화하는 데 최소 2~3년이 걸립니다. 그 사이 AI 모델의 파라미터 규모는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고, 데이터센터 수요는 계속 확대됩니다.

 

AI가 텍스트에서 이미지, 영상, 로봇 동작 제어(모션)로 확장될수록 D램과 낸드 탑재량은 폭발적으로 늘어납니다. 수요 증가 속도가 공급 증가 속도를 영구적으로 앞서는 구조인 셈입니다. 실제로 국내 반도체 업계 최고경영자는 "항공기 엔진을 바꿀 수 있을 정도의 공급이 필요한 시대가 올 것"이라는 표현을 쓴 바 있습니다. 업계 관계자가 이 정도 표현을 쓴다는 건, 수요 예측이 단순한 낙관론이 아니라는 신호로 읽힙니다.

 

한국 증시에서 삼성전자와 SK 하이닉스가 시가총액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는 점도 맥락에서 중요합니다. 동아시아 반도체 기업들의 주당순이익(EPS) 성장률이 미국 S&P 500 전체 평균을 크게 웃돌고 있는 것은 이 쇼티지 구조가 실적으로 반영된 결과입니다(출처: Bloomberg).

이격도와 금리: 언제 버티고 언제 줄일지 판단하는 법

제 경험상 가장 힘든 순간은 주가가 오를 때가 아니라, 올라 있는 상태에서 "더 사야 하나 팔아야 하나"를 반복할 때였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틀렸습니다. 고점 근처에서 더 샀고, 저점 근처에서 팔았습니다.

 

이후 저는 단기 매매 신호보다 두 가지 거시 지표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첫째는 이격도(乖離度)입니다. 이격도란 현재 주가가 5일선·20일선·60일선 등 이동평균선으로부터 얼마나 위 또는 아래에 떨어져 있는지를 수치화한 지표입니다. 이격도가 과도하게 벌어져 있을 때는 매수를 자제하고, 이격도가 좁혀져 있을 때는 오히려 진입을 검토하는 기준으로 씁니다. 지금처럼 주가가 많이 내려온 상태에서 이격도가 이동평균에 근접해 있다면, 공포로 팔기보다는 냉정하게 기회를 탐색하는 시점일 수 있습니다.

 

둘째는 미국 국채 10년물 장기 금리입니다. 2023년 8~10월, S&P 500이 약 10% 급락한 것은 장기 금리가 5%에 육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이후 미국 재무부가 장기 국채 발행 비중을 줄이고 단기 국채 발행을 늘리겠다는 정책 방향을 발표하자 시장은 즉시 안정됐습니다. 펀더멘털이 바뀐 게 아니었습니다. 정부의 스탠스 하나가 시장 방향을 바꿨습니다. 이처럼 연준의 금리 결정보다 정부의 재정 정책과 유동성 배분 의도를 먼저 확인하는 게 지금 시장을 읽는 핵심 순서입니다.

 

닷컴버블 당시 미국 정부는 1998~99년부터 재정 흑자 기조로 전환하며 유동성을 조였고, 이것이 2000년 버블 붕괴의 근본 배경이 됐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지금 미국 정부는 반대로 재정 적자를 유지하며 민간에 유동성을 공급하고 있습니다. 이 기조가 바뀌기 전까지 사이클이 완전히 꺾인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실제로 미국 연방정부 재정 적자 추이는 의회예산국(CBO) 데이터를 통해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출처: 미국 의회예산국).

 

결국 지금 시장에서 필요한 건 매일 계좌를 들여다보며 매수와 매도를 반복하는 트레이딩이 아닙니다. 정부가 AI와 반도체를 전략 산업으로 밀고 있는지, 하이퍼스케일러들의 케펙스 지출이 유지되고 있는지, 장기 금리가 발작 수준으로 오르지 않는지, 이 세 가지를 분기마다 확인하면서 자금 배분 비중을 조절하는 것이 훨씬 현실적인 전략입니다. 공포가 최고조일 때 팔고, 주변 모두가 돈 벌었다고 할 때 비중을 줄이는 것. 말은 쉽고 실행은 어렵지만, 제가 직접 틀려보면서 배운 유일하게 작동하는 원칙입니다.

 

위 내용들을 종합해봤을 때, 저는 지금은 AI버블이 아니라고 봅니다. 하지만 이번에 반등을 하면서 올라가게 되면 그건 정말로 AI버블의 시초일 것이고, 그 버블은 정부가 브레이크를 걸지 않는 한 최소 1년은 더 갈 것이라고 봅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을 바탕으로 작성한 것이며, 특정 종목이나 자산에 대한 전문적인 투자 조언이 아닙니다. 투자 결정은 반드시 본인의 판단과 책임 하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OWOBnRE4N8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