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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 장비를 챙기다 보면 어느 순간 SD 카드 용량이 부족하다는 걸 뒤늦게 깨닫는 순간이 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매장 매대에서 손톱만 한 마이크로 SD 카드를 집어 들며 "이걸로 충분하겠지"라고 생각했던 게 불과 몇 년 전인데, 지금 그 작은 칩이 월가에서 가장 뜨거운 종목 중 하나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샌디스크 이야기입니다.

B&H 전자상가에서 마주친 메모리 카드의 진짜 정체

뉴욕 미드타운에 가면 건물 한 블록을 통째로 쓰는 카메라·전자제품 전문 매장 B&H가 있습니다. 취급 품목만 40만 종이 넘는 곳인데, 저도 촬영 장비를 챙길 때마다 이런 대형 전자상가를 뒤지는 편이라 첫 발을 들였을 때 꽤 반가웠습니다. 그런데 이 매장엔 독특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토요일이면 오프라인 매장뿐 아니라 온라인 주문까지 아예 닫아버립니다. 유대교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인데, 아마존이 1초도 멈추지 않는 시대에 "이날만큼은 돈을 벌지 않겠다"라고 못 박은 겁니다.

그날 매대에서 제 눈을 잡아끈 건 샌디스크 코너였습니다. 마이크로 SD 카드 한 장에 1.5테라바이트(TB), 가격은 약 800달러짜리 960GB 영화용 칩도 버젓이 놓여 있었습니다. 제가 어릴 때 처음 SD 카드를 샀을 때만 해도 수십 메가바이트(MB) 짜리가 전부였으니, 그 격세지감이 매대 앞에 서서도 실감 났습니다. 낸드플래시를 파는 회사가 지금까지 성장해서 이렇게 눈앞에 있는 게 신기했습니다. 여기서 낸드플래시(NAND Flash)란 전원이 꺼져도 데이터가 사라지지 않는 비휘발성 반도체 메모리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우리가 사진이나 영상을 저장할 때 쓰는 SD 카드, SSD 안에 들어 있는 핵심 재료입니다.

한때 뉴욕에는 라디오 로우(Radio Row)라는 전자상가 거리가 있었습니다. 세계무역센터 건설로 통째로 밀려 사라졌고, 그 빈자리를 지금은 B&H가 채우고 있습니다. 컨베이어 벨트로 물건을 나르는 아날로그 감성이 디지털 제품들과 묘하게 어우러지는 공간입니다. 그 공간에서 마주한 샌디스크 로고가 단순한 소모품 브랜드로만 보이지 않기 시작한 건, 이 회사의 역사를 조금 더 파고들고 나서였습니다.

요약: B&H 매장 매대의 샌디스크 제품이 단순 소모품을 넘어, 낸드플래시 기술의 집약체임을 현장에서 직접 체감할 수 있습니다.

 

낸드플래시가 AI 데이터센터의 핵심 인프라가 된 이유

샌디스크의 시작은 1988년 실리콘밸리의 작은 사무실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스라엘 출신 물리학자 엘리 하라리, 인도와 대만에서 온 엔지니어들이 함께 세운 회사인데, 처음 이름은 '선디스크(SunDisk)'였습니다. 하라리의 어린 딸이 "밝고 햇살 같은 이름이면 좋겠다"라고 한 마디 했고, 거기서 나온 이름이었습니다. 1995년에 지금의 샌디스크로 살짝 바꿨지만, 그 소박한 출발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겁니다.

이 회사가 한 일 중 가장 의미 있는 건 SD 카드 표준 제정이었습니다. 도시바, 소니와 함께 표준을 만들어 어느 카메라에서나 같은 카드를 쓸 수 있게 만든 것, 그 공로로 창업자 하라리는 미국 국가 기술 혁신 훈장까지 받았습니다. 제가 현장에서 고프로에 꽂을 카드를 고를 때 브랜드에 관계없이 규격이 맞으면 된다고 당연하게 여겼는데, 그게 사실 이 회사가 만든 세상이었던 겁니다.

2016년 하드디스크 업체 웨스턴 디지털(Western Digital)이 약 190억 달러에 샌디스크를 인수했고, 그 뒤로 브랜드는 남았지만 독립 회사로서는 사실상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그러다 2025년 웨스턴 디지털이 이 사업을 다시 분리하면서 샌디스크가 독립 회사로 부활했습니다.

부활 직후 AI라는 거대한 파도가 덮쳤습니다. AI가 답변 하나를 생성하려면 이미지, 영상, 문서, 기업 데이터 같은 방대한 정보를 읽어야 합니다. GPU가 AI의 두뇌라면 저장 장치는 AI의 기억입니다. 여기서 기업용 SSD(eSSD)란 데이터센터에서 대규모 데이터를 고속으로 읽고 쓰기 위해 설계된 산업용 저장 장치를 말합니다. 소비자용 SSD와 달리 내구성, 신뢰성, 처리 속도 요건이 훨씬 엄격합니다.

HBM(High Bandwidth Memory)이 AI 서버 안에서 연산 중 데이터를 빠르게 주고받는 작업 기억 장치라면, 낸드플래시 기반 기업용 SSD는 방대한 데이터를 장기 보관하는 창고 역할입니다. 쉽게 말해 HBM이 AI의 단기 기억이라면, 낸드플래시는 AI의 장기 기억에 해당합니다. AI가 똑똑해질수록 기억해야 할 데이터는 훨씬 빠르게 불어납니다.

  • 낸드플래시: SD 카드·SSD의 핵심 재료, 비휘발성 반도체 메모리
  • 기업용 SSD(eSSD): 데이터센터 대규모 저장에 특화된 산업용 드라이브
  • HBM: AI 연산용 고대역폭 메모리, SK하이닉스·삼성전자·마이크론이 주요 공급사
  • 샌디스크 부활: 2025년 웨스턴 디지털에서 분리·독립, AI 수요 직접 수혜
요약: 샌디스크의 낸드플래시는 AI 데이터센터의 장기 기억 창고로 재조명되며, 소비자 메모리 카드 회사를 넘어 핵심 AI 인프라 기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AI 메모리 수혜주, 흥분과 냉정 사이

샌디스크 주가가 1년 만에 40배 가까이 뛰는 동안 정작 회사는 비즈니스 적자 상태였습니다. 이런 상황을 두고 시장이 과열됐다고 보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그 판단을 쉽게 내리기가 어렵습니다. 주식 시장은 지금 얼마를 버는지보다 앞으로 얼마를 벌 수 있는지를 사기 때문입니다. 시장이 그렇게 움직인 데는 나름의 근거가 있습니다.

결정적인 건 장기 공급 계약입니다. 샌디스크는 최근 빅테크 고객들과 1년에서 5년짜리 장기 계약 다섯 건을 체결했고, 그중 세 건만 해도 약 420억 달러 규모로 알려졌습니다(출처: The Wall Street Journal). 원래 메모리 산업은 가격이 오르면 공급이 늘고, 공급이 넘치면 가격이 무너지는 사이클을 수십 년째 반복해 왔습니다. 이 사이클 산업(Boom & Bust Cycle)이란 수급 불균형에 의해 호황과 불황이 주기적으로 교차하는 산업 구조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고객들이 먼저 물량을 묶어 두는 장기 계약을 택했다는 점이 다릅니다.

한편으로 저는 메모리 반도체 고유의 범용화(Commoditization) 위험을 가볍게 보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범용화란 기술 진입장벽이 낮아져 여러 경쟁사가 유사한 제품을 공급하면서 가격 결정력이 사라지는 현상입니다. HBM처럼 고도의 커스텀 설계가 필요한 제품과 달리, 낸드플래시는 상대적으로 여러 공급사가 경쟁하는 구조입니다. 제 경험상 소모품 취급을 받던 물건이 갑자기 인기를 끌면 그만큼 빠르게 공급이 따라붙더라고요. 공장 증설 경쟁이 본격화되면 수급 불균형이 재발할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습니다.

실제로 이 시장을 둘러싼 전문가 의견은 정반대로 엇갈립니다. 한쪽은 AI가 메모리 산업의 구조 자체를 바꾸고 있다고 말하고, 다른 쪽은 결국 공급이 늘어나면 가격이 무너질 것이라고 말합니다(출처: Bloomberg). 올해 SK하이닉스가 시가총액 1조 달러를 넘기고, 샌디스크 공동 창업자 산제이 메로트라가 경쟁사 마이크론의 CEO로 호황을 누리는 모습은, 이 싸움이 얼마나 판을 크게 벌이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다시 봐도 감회가 새롭습니다. 제가 매대에서 집어 들던 그 작은 카드가 이렇게 거대한 투자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요약: 장기 공급 계약은 긍정적 신호지만, 낸드플래시 특유의 범용화·사이클 리스크를 함께 고려한 냉정한 시각이 필요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샌디스크는 어떻게 다시 독립 회사가 됐나요?

A. 2016년 웨스턴 디지털이 약 190억 달러에 샌디스크를 인수했고, 이후 샌디스크는 큰 회사 안에 묻혀 있었습니다. 그러다 2025년 웨스턴 디지털이 낸드플래시 사업을 다시 분리하면서 샌디스크가 독립 법인으로 부활했습니다. 때마침 AI 수요가 폭발하며 재상장 직후 시장의 집중 조명을 받게 됐습니다.

 

Q. HBM이랑 낸드플래시는 뭐가 다른 건가요?

A. HBM(고대역폭 메모리)은 AI가 연산하는 도중 데이터를 빠르게 주고받는 작업 기억 장치로, SK하이닉스·삼성전자·마이크론이 주로 공급합니다. 반면 낸드플래시는 대규모 데이터를 전원이 꺼져도 안전하게 보관하는 장기 저장 매체입니다. AI로 비유하면 HBM은 단기 기억, 낸드플래시는 장기 기억에 해당합니다.

 

Q. 메모리 반도체 사이클 리스크가 여전히 존재하나요?

A. 이 부분은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립니다. 장기 공급 계약이 가격 변동성을 일부 완화해 줄 수 있다는 시각도 있는 반면, 낸드플래시는 HBM보다 기술 진입장벽이 낮아 공급사 증설 경쟁이 본격화되면 수급 불균형이 재발할 수 있다는 우려도 존재합니다. AI 수요가 구조적으로 다르다고 보는 시각과, 결국 공급이 따라붙으면 가격이 무너질 것이라는 시각, 두 가지 모두 일리가 있습니다.

 

Q. B&H 매장이 토요일에 문 닫는 이유가 뭔가요?

A. B&H는 유대교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매주 토요일 오프라인 매장뿐 아니라 온라인 주문도 전면 중단합니다. 아마존처럼 24시간 운영이 당연한 시대에 스스로 하루 매출을 포기하는 선택으로, 이 원칙은 창업 이래 수십 년째 유지되고 있습니다.

 

결론

B&H 매대에서 집어 든 샌디스크 카드 한 장이 이렇게 긴 이야기로 이어질 줄은 몰랐습니다. 제 10년간의 투자 경험상, 일상에서 아무 생각 없이 쓰던 소모품이 어느 날 거시 경제와 연결되는 순간은 늘 뜻밖에 찾아옵니다. 소비자가 매대에서 집어 드는 물건과 월가의 수십조 원짜리 장기 계약이 사실 같은 기술 위에 서 있다는 것, 그게 이번에 제가 가장 크게 실감한 부분입니다.

장기 공급 계약이라는 긍정적 신호는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낸드플래시의 범용화 위험과 사이클 산업 특유의 공급 과잉 리스크를 무시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AI 메모리 수혜주에 관심이 있다면, 샌디스크뿐 아니라 SK하이닉스, 삼성전자, 마이크론의 기업용 SSD 전략도 함께 살펴보는 게 균형 잡힌 시각을 갖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답은 아직 아무도 모르지만, 질문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부터가 시작입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8ifkwnuet-M